[문화일보] 범정스님 인터뷰 “中2때 강제 출가·軍입대 두 번… 이번 생엔 승복 입고 죽겠다 결심 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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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람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09-11 10:33 조회15회 댓글0건본문
■ M 인터뷰 - 화엄사 ‘꽃스님’ 범정 스님
열다섯살에 남동생과 절집 생활 20대까지 ‘속퇴’생각하며 방황
잠시라도 평범하고 싶어 입대 육군 사병 뒤 해군 장교로 복무
꽃처럼 살고 싶어 ‘꽃스님’ 지어 유명하길 원했으니 ‘관종’ 맞아
뛰어난 외모는 전생에 지은 福 ‘쓰임’으로 생각 열심히 갚아야
3년째 SNS로 ‘마음 OS’ 포교 정리·베풂 통해 새롭게 사세요
최근 전남 구례 화엄사 보제루에서 만난 범정 스님은 “스마트폰을 업데이트하듯 현대인의 마음도 주기적 점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한불교조계종 화엄사(전남 구례)의 홍보국장을 맡고 있는 범정(凡鼎) 스님(32). SNS 3만5000여 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인플루언서 스님’으로 화제다. 계정 이름이 법명보다 유명하다. ‘꽃스님’. ‘꽃미남 스님’을 줄인 걸까. 프로필 사진이 꽃처럼 화사하긴 한데, 자꾸 보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올라온다. 유난히 하얀 피부에 선명하고 빨간 입술. ‘화장했나요?’ ‘피부 관리 받나요?’ 호기심과 비아냥이 뒤섞인 메시지가 수십, 수백 통 쌓였을 때 범정 스님은 스스로 라이브 방송을 열고 세수를 했다.
거칠 것 없는 행보도 화제지만, 그 덕에 화엄사는 스님을 보겠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인다. 지난달 사찰 체험 프로그램 ‘화야몽’은 단 몇 분 만에 매진. 경쟁률은 무려 90대 1이었다. 폭염을 뚫고 2030 젊은이들이 화엄사로 향한 이유엔, 스님이 해군 장교 근무를 마치고 이제 막 제대한 까닭도 있었다. 흥미로운 건, 이게 두 번째 군 생활이었다는 것. 지난 8월 하순, 화엄사 보제루에서 스님을 만났다.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출가한 배경, ‘꽃스님’의 유래, 그리고 군대를 두 번이나 다녀온 사정 등을 들었다.
―범정 스님보다 ‘화엄사 꽃스님’이란 수식어가 더 유명하다. 스님이 ‘외모’로 과한 주목을 받는 게 흥미로운데, 솔직히 어떤 기분일지도 궁금하다.
“예쁘다, 잘생겼다라는 것도 다 칭찬 아닌가. 칭찬은 들을수록 좋고, 이 또한 나의 ‘쓰임’이라 생각하면 기쁘다. 화엄사 밖에서도 알아봐 주는 분들이 많다. 만날 때마다 반갑고 뿌듯하다.”
―‘꽃스님’이란 이름으로 SNS를 하며 세상에 자신을 직접 드러냈다. ‘쓰임’이라 했는데, 속세에선 그런 걸 ‘관종(관심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관종 맞는 것 같다(웃음). 열다섯 살에 내 뜻과 상관없이 절에 들어왔는데, 유명해지고 싶다는 건 온전히 나의 의지였다. 스승님(우석 스님·현 화엄사 주지)께 허락을 받아 2022년부터 SNS를 시작했는데 팔로어(현재 3만5000명)가 금세 늘었다. 소통이 재밌고, 이런 활동에 만족한다. 관종이면 뭐 어떤가. 그게 중요한가. 거짓말 안 하고, 약속을 잘 지키고, 누가 보든 안 보든 그저 내 삶을 잘 살면 그만이라 생각한다.”
―스님이 유명해진 데는 외모와 별명 덕이 분명 있다. 그것이 수행자로서, 불교적으로서, 타당한가. 겉모습, 세간의 관심 등은 사실 수행에 방해 요소 아닌가.
“나는 이걸 나의 ‘쓰임’으로 본다. 화엄사 스님들로부터 줄곧 ‘너는 복을 타고났다’ ‘열심히 그 복을 갚아라’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또한, 불교적으로 봐도 뛰어난 외모는 전생에 많은 복을 지어서 얻은 것이기도 하다. 부처님 10대 제자 중 최고의 미남으로 알려진 아난존자는 수행력도 탁월했고, 여성 출가를 실현시킨 인물로도 추앙받는다.”
―‘꽃스님’은 누가 지어줬나.
“조금 골 때리겠지만…, 내가 지었다(웃음). 그런데 ‘꽃미남’이 아니라 ‘꽃처럼 살자’는 뜻이다. 그렇게 ‘쓰임’ 받고 싶다는 의미도 있다. 너무 멀면 향기를 못 느끼고, 너무 가까우면 그 향이 역한 게 꽃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아름다운 존재가 되겠다는 것이다. 어려운 불교용어보다는 하루를 향기롭게 버티는 데 도움이 되는 말과 연습을 제시하고 싶다. ‘앞에서 끌고 가는 리더’보다는 ‘옆에서 보폭을 맞추는 동반자’로서 말이다.”
―제대한 지 한 달 좀 넘은 걸로 안다. 군대를 두 번이나 다녀와서 또 화제다. 혹시 사찰 수행이 군대 생활보다 괴로웠던 것 아닌가.
“화엄사 수행이 만만치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아니다(웃음). 약 4년간 해군 군종 장교로 복무했다. 그 전에 육군 사병으로 최전방에서 근무하고 병장 만기 제대를 했다. 이때 이미 출가한 신분이라 군종 장교로 갈 수도 있었지만, 또래 장병들과 생활하고 싶었다. 10대에 절에 들어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잠시라도 대한민국 20대 보통 남성으로서 좀 평범해지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그런데 그 경험이 군종 장교를 할 때 도움이 됐다. 또 군에서 배운 규율과 팀워크는 지금의 대중 포교에도 큰 힘이 된다.”
―지금까지 이야기만 들으면, 혹시 승복이 안 맞는 옷이 아닌가 싶다. 어릴 때 절을 많이 뛰쳐나갔다고 들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절이 집이 됐다. 빅뱅의 춤과 노래를 따라 하던 평범한 10대였는데, 절이 좋았겠는가. 답답하고 싫었다. 말 그대로 ‘가출’을 일삼은 것이다. 부모의 의지가 강력하게 반영된 ‘출가’에 상실감과 배신감도 컸다. 방황은 20대까지 이어졌고, 내내 ‘속퇴(출가 승려가 속세로 돌아가는 것)’를 생각했었다.”
―부모의 의지라고 했다. 불심이 깊은 집안이었나.
“그렇지 않다. 낯설고, 전혀 준비가 안 된 출가였다. 열다섯 살 때 열두 살 남동생과 함께 화엄사에 들어왔다. 이 모든 게 부모의 개인적 욕심 탓이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지금은 화엄사에서 스님들께 받은 사랑으로, 그조차 ‘복(福)’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부모 덕에 불가(佛家)와 인연을 맺게 됐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환속’엔 미련이 없는 것인가.
“오랫동안 ‘범정’보다 ‘용정원(속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았다. 끝없이 세계를 의심했고, 나 자신을 실험하고…. 부모가 권한 길, 스님들이 맞다고 했던 길이 정말 답일까. 그러다 점차 많은 것들이 해소되고 불교에 스며들었다. ‘이번 생엔 승복을 입고 죽겠다’는 결심이 서더라. 다만 절에서 자랐으니 스님이 됐다거나, 승복을 입었으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유로우면서도 독립적으로 만들고 가꿔 나가려 한다. 그 마음이 발현된 것이 군대였고, 또 ‘꽃스님’ SNS였다.”
―빅뱅을 좋아했다고 했는데, 출가하지 않았다면 뭘 했을 것 같나.
“음… 연예인(웃음)? 지금도 지드래곤 관련 영상과 기사는 다 찾아본다. 소위 말하는 ‘최애’다. 부모와 화엄사 스님들을 제외하고, 10∼20대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을 꼽으라면 지드래곤일 것이다. 그의 음악도 춤도 스타일도 다 좋지만, 무엇보다 자기 일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이 드러나는 당당한 태도를 존경한다. 한때는 혹시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상상했다. 춤과 노래도 따라 해봤다. 음…, 불가능한 꿈이었다, 하하.”
―불교박람회에 2030이 북적이고, ‘힙불교’라는 말까지 생겼다. 사찰마다 개성을 살린 이벤트도 많이 연다. ‘꽃스님’ 열풍도 어느 정도 그 흐름을 탔다. 긍정적이면서도 우려의 시선도 있는데…. 사실 이런 현상이 종교의 본질을 흐릴 수도 있지 않나.
“부처님은 세상이 행복하다고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다. 또, 세상이 언제 ‘말세’가 아닌 적 있던가. 종교가 ‘위기’ 아닌 적 있던가. 형태만 자꾸 바뀔 뿐이지 늘 같은 문제는 반복돼 왔다. 중생들은 행복을 추구한다면서, 평생 괴롭게 살고…. 그래서 특별히 불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선 평가도 판단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점점 더 다양한 마음과 다양한 수행, 다양한 포부를 가진 스님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현실에 맞게 실천을 하시는 중인 것 같다.”
―출가자도 신자 수도 줄고 있는데, 위기가 아닌가. 화엄사 승가대학도 문을 닫았다.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상황이 그렇다. 그래서 ‘찾아가는 종교’가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그래서, 오히려 기회라고 본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해 정보와 지식이 난무하게 될수록, 진심과 감정이 중요한 종교가 더 빛을 발하게 될 테니. 또한 출가자가 없을수록, 어설픈 100명보다 진심의 수행자 한 명을 길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신도 수가 몇 명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불교의 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절실한 때다.”
―‘힙불교’가 다음 세대를 위한 포교법이라는 건가. 얼마 전 화엄사에서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화야몽’이 9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스님만의 소통법이 궁금하다.
“요즘 친구들에게 불교가 ‘요즘 종교’가 될 수 있으려면, 불교가 문제를 지적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걸 인식시켜야 한다. 나는 그저 지금 자신의 상태(버전)에서 조금만 업데이트하자고 말한다. 특히 Z세대와의 소통법을 많이 연구했는데, 길게 말하지 않고 바로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제시하는 편이다. 예컨대 ‘1분 숨, 1줄 기록, 1가지 실천’ 같은 것. 가벼운 마음이 쌓이면, 어느새 마음의 체력이 붙는다.”
―SNS 등에서 ‘마음 OS’라는 표현을 자주 쓰신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업데이트하자는 것인가.
“스마트폰도 업데이트하듯, 마음도 주기적 점검이 필요하다. 나는 4가지를 기본 세트로 둔다. 호흡(진정), 관찰(자각), 정리(선택과 집중), 베풂(관계 회복). 이 4개를 돌려보면, 마음은 고장이 아니라 ‘정비가 필요한 상태’로 보이기 시작한다. 자책 대신 관리를 하게 된다. ‘오늘 내 OS 버전은 어떤가? 호흡은 안정적인가? 생각은 과열되지 않았나? 정리는 되었나? 베풀고 있나?’ 이렇게 묻고, 작은 패치부터 적용하면 된다. 우린 고장 난 게 아니라 그저 주기적인 업데이트가 필요한 존재다.”

해군 장교로 복무하고 지난 7월 제대한 스님이 장병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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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정 스님은 부모의 권유로 열다섯 살에 막냇동생(당시 열두 살)과 함께 전남 구례 화엄사로 동진 출가(어린 시절에 출가하는 것)했다. 질풍노도의 시기. “답답하다”며 세 번이나 가출, 아니 ‘사(寺)출’했다. 은사인 우석 스님(현 화엄사 주지)과, 노스님 종삼 스님은 며칠 뒤 일주문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들어오는 그를 늘 따뜻하게 품었다. 최근 상좌(제자)를 받았다는 범정 스님은 이제야 그 큰마음을 조금 헤아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얼마나 노심초사하시고, 얼마나 애틋하셨을까요.”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를 졸업한 뒤 비구계를 받은 스님은 25세에 병사로 입대해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출가 신분이면 가능한 군종 장교를 거부하고, 또래 장병들과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 군인 생활을 한 것. 그리고 해군 군종 장교로 다시 입대한다. 제주 해봉사·해관사, 해군진해기지사령부 해안사에서 복무하며 ‘주지’ 소임을 맡았다. 스님은 “20대에 주지를 해보는 게 소망이었는데, 그건 벌써 이뤘다”며 웃었다. 이 무렵 스님은 ‘꽃스님’이란 별칭으로 SNS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자고 일어나면 수십 명, 수백 명씩 늘어나 지금은 팔로어가 3만5000여 명에 이른다. 현재 한 달 방문자 수만 500만에 가깝다. “장병들 앞에서 목탁을 치지도 않고, 그저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며 친한 형처럼 지냈어요. 이들이 소문을 냈나(웃음)…. 갑자기 유명해진 이유는 저도 잘….”
스님은 10대 시절, 종삼 스님을 유독 따랐다. 지금도 그분이 롤모델이다. “스님은 일년 내내 멋졌어요. 하루도 편하게 승복을 입거나, 지저분한 적이 없었죠. ‘중은 중다워야 한다’고, 또 ‘중은 폼생폼사’라고 늘 말씀하셨죠.”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지만, 품위 있는 수행자의 외관은 분명 감화를 일으킨다. 어느새 스님도 그 기운을 닮았다. 스님은 2024년 서울국제불교박람회 홍보대사, 대한불교조계종 ‘출가 포스터’ 모델, 국가유산청 불교자연유산 홍보대사 등을 맡았다.
박동미 기자(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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